사이트 내 전체검색

 

유물 · 사적

본문

 icon.gif17세. 석우

back.png

 

1. 逸松公 諱 錫雨 碑文

朝鮮王朝 成宗大王 四子 完原君의 二世는 伊城君, 三世 義原君, 四世는 雲興正, 五世 諱 琫은 贈 兵曹參議다. 六世 諱 惟精은 正三品 禦侮將軍으로 거창 國農所에 입향조이시고, 다시 十世 諱 漢植(植燮)從二品 嘉善大夫께서 이곳 監谷에 入鄕하셨다.

公은 17世로 字 華佰 號 逸松으로 1922年 生이시다. 考諱 駿九의 三男三女中 長男으로 配는 恩津人 宋義用의 따님으로 슬하에 三男三女를 두었다.

公은 일찍이 日本에 留學하였고, 解放 후에 警察 公務員으로 奉職하면서 韓國動亂에 수많은 戰鬪에 참여 하여 赫赫한 功을 세웠다. 特히 居昌 良民虐殺事件과 비슷한 環境에 처했던 故鄕 마을을 동생과 緊密하게 連絡하여 免하게 한 功勞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乙未와 丙申年에는 連續的인 山間地方의 大凶年이 들었다. 戰爭의 傷處가 아물지도 않은 狀況에서 당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警察職을 辭任하고, 고향에 돌아와 山坂工事를 시작하여 老母를 奉養하고 고향 사람의 饑饉을 解決하기도 하였다. 후에도 여러 곳에 精米所를 經營하기도 하고, 馬山에서는 建設 分野에도 손을 댔지만, 恒常 남에겐 厚한 人性이니 利得이 있을 수가 없었다. 末年에는 故鄕에 돌아와 餘生을 보내셨다.

공께서는 특히 집안의 從弟나 조카들에게 베푼 向學熱은 보기 드문 逸話다. 조카들을 친자식과 마찬가지로 다니는 學校를 訪問하시고, 또 하숙집을 찾아와 정감을 베풀어 큰 덕을 쌓으셨다. 종제를 勤務地에 데리고 가서 工夫를 시키기도 하였다. 훈육의 일성이 “사내는 돈을 몰라야 한다.”라고 늘 강조하셨다. 이 얼마나 가문을 위한 위대한 犧牲이었을까. 감읍할 따름이다.

公의 長男 濟珩은 農協에서 奉職 하였고, 配는 密陽 朴昌在의 女로 二男一女이고, 次男 周珩은 韓國通信公社에 奉職 하였으며, 配는 晉陽 柳海允의 女로 一男一女이고, 季男 仁珩은 會社에 奉職하였고, 配는 晉陽 河辰洪의 女로 一男一女다. 사위는 次例로 晉陽人 河載慶, 順興人 安在戊, 仁同人 張盛宇다.

향년 83세로 묘소는 대지리 1구 전 349번지에서 2019년 5월에 「선영하 동뫼」 부부합장 酉坐로 이장하였다.

 

2. 逸松公 諱 錫雨 遺事

公은 17世로 字 華佰 號 逸松으로 1922年 生이시다. 考諱 駿九의 三男三女中 長男으로 配는 恩津人 宋義用의 따님으로 슬하에 三男三女를 두었다.

公은 일찍이 日本에 留學하였고, 解放 후에 警察 公務員으로 奉職하면서 韓國動亂에 수많은 戰鬪에 참여 하여 赫赫한 功을 세웠다. 特히 居昌 良民虐殺事件과 비슷한 環境에 처했던 故鄕 마을을 동생과 緊密하게 連絡하여 免하게 한 功勞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乙未와 丙申年에는 連續的인 山間地方의 大凶年이 들었다. 戰爭의 傷處가 아물지도 않은 狀況에서 당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警察職을 辭任하고, 고향에 돌아와 山坂工事를 시작하여 老母를 奉養하고 고향 사람의 饑饉을 解決하기도 하였다. 후에도 여러 곳에 精米所를 經營하기도 하고, 馬山에서는 建設 分野에도 손을 댔지만, 恒常 남에겐 厚한 人性이니 利得이 있을 수가 없었다. 末年에는 故鄕에 돌아와 餘生을 보내셨다.

공께서는 특히 집안의 從弟나 조카들에게 베푼 向學熱은 보기 드문 逸話다. 조카들을 친자식과 마찬가지로 다니는 學校를 訪問하시고, 또 하숙집을 찾아와 정감을 베풀어 큰 덕을 쌓으셨다. 종제를 勤務地에 데리고 가서 工夫를 시키기도 하였다. 훈육의 일성이 “사내는 돈을 몰라야 한다.”라고 늘 강조하셨다. 이 얼마나 가문을 위한 위대한 犧牲이었을까. 감읍할 따름이다.

公의 長男 濟珩 次男 周珩 季男 仁珩이고, 사위는 次例로 晉陽人 河載慶, 順興人 安在戊, 仁同人 張盛宇다. 향년 83세로 묘소는 2019년 5월에 「선영하 동뫼」 夫婦合墳 酉坐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