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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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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gif15세. 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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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月樵居士 諱 昌薰 비와 碑文

 

you5.jpg全州李公 諱 昌薰居士의 字는 景見이고 號는 月樵·小山으로 조선왕조 성종대왕의 四子 完原君의 十五世이시다. 입향조이신 가선대부 한식(식섭)공께서 병목 감곡에 입향한 이후 백 년이 될 즈음인 丙子 1876年 12月 27日에 출생하셨다.

공은 남명선생의 경의사상을 사숙하여 선비정신을 실천한 학자로 알려진다. 집안에서는 지극히 엄격하셨고, 밖에서는 온화한 성품으로 외유내강으로 선비의 기품을 지키시다 향년 74세를 누렸다.

공께서 성장하는 동안에 신원에서 일족들의 일부가 합류하니 세대가 늘어갔다. 이제부터는 태어나는 자녀들을 훈육할 면학의 장이 필요하였다. 아울러 훈장이 거처하고 찾아오는 빈객을 맞이할 장소 또한 시급했기에, 公의 아버지 根有처사께서 집 한 칸을 마련하려다 운명하시니 공께서 일족과 힘을 합하여 小山齋를 창건하였다.

小山이란 齋號는 중국의 고사에서 ‘회남왕 유씨들의 신선 되려는 무리다.’ 한양에서 머나먼 서부 경남의 시골에 사는 왕손의 삶이기에, 세도정치로 망하여 가는 王室의 비운을 바라만 보자니, 마치 초나라가 屈原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버렸기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두고 거사(居士)께서 시대를 논증하고 諷諫하여 소산을 재호로 삼은 것이다.

원원군 파보에서 공의 기록을 보면, 性德諄原 文學淵深 爲師友推重이라 했다. 스승으로 추앙 받음이 당연하리만큼 이웃 원근에서도 제자들이 찾아왔다.  

 

公의 配는 草溪인 鄭斗淵의 따님으로 슬하에 四男二女를 두었으니, 長男은 梅叟 駿九로 배는 恩津인 宋仁湜의 따님이고, 次子는 桂軒 應九로 配慶州인 崔斗煥의 따님이고, 繼配는 仁同 張氏이다. 三子는 字尙直 秉九로 배는 平山인 申泰權의 따님이고, 넷째는 字敬直 丁九로 배는 驪興인 閔永瑗의 따님이고, 繼配는 慶州李氏다. 서는 恩津인 宋鎬增과 宋寅玉이다.

墓는 엄나무정 부부쌍분 子坐로 1971년 淸明節에 弟子들이 立石하였다. 2019년 5월에  「선영하 점독골」 夫婦合墳 子坐로 이장하였다.   

 

2. 月樵居士 諱 昌薰 遺事

全州李公 諱 昌薰居士의 字는 景見이고 號는 月樵·小山으로 조선왕조 성종대왕의 四子 完原君의 十五世로 1876年에 출생하셨다.

公은 南冥先生의 敬義思想을 私淑하여 선비정신을 실천한 學者로 알려진다. 집안에서는 지극히 엄격하셨고, 밖에서는 온화한 성품으로 외유내강으로 선비의 기품을 지키시다 향년 74세를 누렸다.

태어나는 자녀들을 훈육할 면학의 장이 필요하였다. 아울러 훈장이 거처하고 찾아오는 빈객을 맞이할 장소 또한 시급했기에, 公의 아버지 根有처사께서 집 한 칸을 마련하려다 운명하시니 공께서 小山齋를 창건하여 후진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小山이란 齋號는 중국의 고사에서 ‘회남왕 유씨들의 신선 되려는 무리다.’ 한양에서 머나먼 서부 경남의 시골에 사는 왕손의 삶이기에, 세도정치로 망하여 가는 王室의 비운을 바라만 보자니, 마치 초나라가 屈原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버렸기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두고 居士께서 시대를 논증하고 諷諫하여 小山을 재호로 삼은 것이다.

公의 配는 草溪인 鄭斗淵의 따님으로 슬하에 四男二女를 두었다. 長男은 梅叟 駿九, 次子는 號 桂軒 應九, 三子는 字 尙直 秉九, 넷째는 字 敬直 丁九이고, 서는 恩津인 宋鎬增과 宋寅玉이다.

墓는 엄나무정 부부쌍분 子坐로 1971년 淸明節에 弟子들이 立石하였다. 2019년 5월에 「선영하 점독골」 夫婦合墳 子坐로 이장하였다.

 

3. 小山齋(月樵居士 諱 昌薰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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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재지 : 경남 합천군 대병면 대지5길 1351-2 소산재

 

4. 小山齋記

 

삼가현 북쪽 月如山 아래 작은 마을이 있으니 監谷이라 한다. 골이 깊고 산이 첩첩하고 바위사이로 굽이쳐 흐르는 물이 맑으니 隱士가 밭 갈고 살만한 곳이다.

이곳은 {朝鮮王朝 第九代 成宗大王의 第四子 完院君의 10世孫 漢植(植燮- 嘉善大夫)}께서 터 잡으시고, 그의 四대손 根有가 敎育할 집 한간을 지으려고 하다가 세상을 버렸다. 그의 子姪 三薰과 驥薰 일가들이 마침내 집을 지었으니 三間에 방이 두간이니 스승과 제자가 거처하고 賓客을 접대할 만하게 구비되었다. 이름을 小山齋라 하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거늘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글을 헌 신짝처럼 버리는데 재실은 빈 재실이 될 것이며 한문을 어디에 쓸려고 기문을 청하는 고 하였다. 생각해보니 소산이란 齋號가 우연치 않아서 演義하지 않을 수 없다.

小山은 淮南王 劉氏들의 신선 될려는 무리다. 세상에서 뛰어난 屈原을 思慕하여 이를 본받으려고 했다. 굴원은 楚나라 공족이며 어진 대부였다. 초나라가 그의 말을 듣고 그의 道를 행하였으면 武關의 恥辱이 없고, 그 나라는 天下에 强大國이 되었을 것인데, 그의 말을 쓰지 않고 그 사람을 버렸는데 나라도 망하였으니 어찌 비참하지 않겠느냐. 小山子가 그 시대를 論定하여 옛 일을 지금에 比喩하여 諷諫한 것이다.

劉安은 漢나라 宗室이다. 그의 글이 고고하고 그 뜻이 悢惻하여 詩傳 小時의 變調로 千歲에 뜻을 펴지 못한 슬픔이 담겼으니 뜻있는 선비의 눈물을 영원히 뿌리게 한다. 이 씨들이 재명을 소산이라 한 것은 이 뜻이 아닐는지요.

아! 朝鮮이 망한 지가 오래되었고, 호랑이와 표범과 솔개가 뜻을 어디서 날뛰는 세상에 어느 곳 어느 누가 招隱操 일편을 읽을까? 내 자네와 같이 그 집에 살면서 나물 먹고, 물마시고 天下泰平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같이 쓰고 이씨는 전주이씨 朝鮮王朝 成宗大王의 후손이다.

 

靖山人 宋鎬坤 撰